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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핑크스토리 수기 공모전 - 실버스토리 수상작 [유방암 그리고 나의 두 번째 직업]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10.06.
조회수
2,211
첨부파일



유방암 그리고 나의 두 번째 직업



조연우







나는 1989년 4월 24일 대림성모병원에서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조국현, 정연남 부부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 병원에서 태어난 두 번째 rh- 혈액형을 가진 산모의 아이이자, 모두 아들일 거라고 확신한 우량아였다고 한다. 출생부터 튼튼했던 만큼 성장과정에서도 잔병치레 한 번 겪지 않았다. 건강 걱정은 해 본적도 없었다. 그런데 앉은 자리에서 소주 다섯 병을 거뜬하게 마시는, 신장 170cm의 건장한 내가 28세에 돌연 암 환자가 되어버릴 줄이야.

​ 2016년 겨울의 어느 날, 샤워를 하다가 우연히 가슴에 만져지는 몽우리를 발견했다. 질감이 조금 이상하지만, 크기가 작아서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런 것은 빨리 떼 버리는 게 좋다는 조언을 들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동네 유방외과를 찾았다. 결과는 암이었다. 병기는 2기 b. 초진 병원에서 1기 정도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수술장에서 겨드랑이 림프의 10mm의 전이까지 발견되었다. 암 병력도, 유전적 요인이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치료를 시작하며 직장을 그만두었다. 휴직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자신이 없었다. 항암 주사를 맞은 지 2주일쯤 되니 서서히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건강, 친구, 직장, 외모 등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조금씩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암 진단 소식을 들은 후 온 가족이 나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30대에 겪은 사고 이후, 무서워서 20년간 운전대를 잡지 못하던 엄마께서는 통원을 위해 운전 연습을 시작하셨다. 항암 가발, 비니, 손톱 보호제 등 필요하지만 정신이 없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주변 용품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언니가 준비했다. 아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카드를 내밀었다. 사고 싶은 노트북을 사고 병원비도 쓰라며 말하는 아빠의 눈이 빨갰다. 그런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괜찮았고, 괜찮아야만 했다.

​ 가족의 보호 속에서 무난히 1차, 2차 항암치료를 마쳤다. 유기농, 건강식 등 몸에 좋다는 음식 위주로 먹으며 외출은 자제했다. 부작용 때문에 힘든 날에는 약을 먹고 푹 자면 괜찮아졌다. 가끔 가슴에 뭐가 맺힌 것처럼 답답했지만, '이대로 항암을 마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하고 마음을 다독였다.

그런데 항암 3차 중의 어느 날 새벽,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났다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울컥했다. 민머리, 눈썹도 거의 다 빠진, 퉁퉁 불어있는 얼굴은 노랗게 떠 있는 누가 봐도 환자인 모습. 거울 속에는 낯선 사람이 서있었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잠든 엄마의 숨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갑자기 눈에서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친구들이나 전 직장동료들이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사는 것일까?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 '그래 죽자.'

까짓 거, 어차피 살아도 평생 이렇게 살 텐데 이런 삶을 연명해서 뭘 하겠어. 내가 살아봐야 가족들에게도 짐밖에 안될 텐데. 그런데 '죽는 방법'을 생각하니 다시 막막해졌다. 목을 매면 가족에게 너무 큰 충격일 것 같고, 손목을 긋는 것은 무서워서 못 할 것 같다. 어디서 뛰어내리는 것은… 고민해봐도 도무지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하게 죽을 방법이 없었다. 솔직히 살기도 막막했지만 당장 죽기에는 억울하기도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착하게는 아니라도 남들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살았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기에 암에 걸렸고 고작 28살에 죽을 생각이나 하고 있단 말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창 밖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잠을 못 자서 눈꺼풀은 무거웠지만, 선선한 새벽바람에 왠지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암 치료를 하며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살아남는 것 이상의 목표가 필요해!' 그날부터 표준 치료가 끝나는 날만을 기다렸다.

​ 치료를 마치고부터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투병 기간 동안은 주로 치료가 끝나면 뭘 할까에 대해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직장에 다닐 때 바빠서 엄두도 못 냈던 여행이었다. 가까운 일본을 시작으로 라오스, 스페인, 보라카이, 터키, 모로코, 영국, 포르투갈 등. 표준치료는 모두 마쳤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타목시펜을 먹고 있었고, 주기적으로 졸라덱스 주사를 맞아야 했기에 일반인에 비해서는 제약이 많았다. 가족의 걱정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반대하시던 엄마께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다고 솔직히 말씀드리며 설득했다. 하나 둘 여행의 기록이 쌓여갔다. 여행기를 꾸준히 블로그에 업로드하며 '여행 블로거'로써 활동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사진이 나의 적성에 꽤 잘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틈만 나면 새로운 곳을 찾아 쏘다녔고, 여행지 관련 원고를 쓰거나 팸 투어(여행을 협찬해 주는 것)도 가는 등 바쁘게 지냈다.

그런데 작년 여름, 일정에 갑작스러운 차질이 생겼다. 강아지와 놀다가 식탁에 찧어서 발가락이 부러진 것이다. 발가락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꼼짝없이 부러진 뼈에 철심을 고정하는 수술을 받고 두 달간 깁스를 해야 했다. 불편하고 아픈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한동안 여행을 못 가게 된 것에 상심이 컸다. 이때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충격적인 유방암 진단의 순간, 투병의 기록, 치료 후의 삶, 여행지에서의 기억 등을 생각나는 대로 적고 또 적었다. 깁스를 풀 때쯤 세어보니 쌓인 원고가 약 80p 가량 되었다. 그 원고를 출판사에 투고한 것은 충동적이었지만, 덕분에 뜻이 잘 맞는 출판사를 만날 수 있었다. 사진과 글을 다듬어가며 약 1년여의 준비 끝에 2020년 8월 3일, 20대 암 환자의 여행 에세이 <낙타의 관절은 두 번 꺾인다>를 출간했다.

내가 유방암에 걸리고 달라진 것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기록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이전까지 나는 일명 귀차니스트로 사진, 눈 업로드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몸이 아프고 나서야 네이버 블로그에 투병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 기록으로 나와 같은 상황의 환우 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치료 중에는 투병에 관해, 치료를 마치고는 여행에 관한 기록을 꾸준히 업로드했다. 꼼꼼하게 기록하고 사진도 열심히 찍었다. 덕분에 치료를 마치고 난 약 1년 후에는 여행 크리에이터로 성장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글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 둘 쌓인 여행의 기록으로 누군가에게 나 스스로를 소개할 일이 생기면 '여행 블로거' 혹은 '여행 크리에이터'라고 소개하기는 했지만,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것은 '나만 즐거운 여행'이 아니었다. 여행은 좋은 취미였지만,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젊은 암 경험자로써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내가 암 진단을 받고 막막했을 때, 암에 걸렸어도 행복하게 살고 있는 환우 들의 이야기를 가까이서 접했다면 죽음을 먼저 떠올리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활발한 sns 활동과 함께 오랜 기간을 준비해서 에세이를 출간했다. 28살에 암에 걸린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시작한 에세이의 출간은 나에게 단기 목표의 달성이자, 작가라는 새로운 직업을 선사했다.

​ 유방암 진단을 받은 지도 어느새 4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나는 회사원에서 암 환자가, 암환자에서 여행 블로거가, 그리고 에세이 작가가 되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상상도 못한 변화가 함께한 것이다. 이제야 말하지만 나는 내가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살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유방암에 걸리기 전에는 암에 걸리면 삶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32살, 4년 차 유방암 환우인 나는 오히려 아프기 전보다 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행복할 때는 웃고, 슬플 때 울고, 화가 날 때는 화도 내며 평범하지만 즐거운 삶을 살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유방암에 걸린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한 경험을 했지만 스스로가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치병으로 인해 잃은 것을 생각 하기보다는 얻은 것에 대해 감사하며 건강을 지켜나가겠다. 함께하는 환우 자매님들, 사랑하는 가족, 스스로도 몰랐던 적성, 새로운 직업 등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