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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스토리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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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핑크스토리 수기 공모전 - 브론즈스토리 수상작 [파도타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10.06.
조회수
2,289
첨부파일



파도타기



홍성주







"당신 암이래. 암이 맞대."
 "응."

 세상에서 가장 짧은 대답을 건네고 수화기를 내려놓았지만 남편의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되돌아와 귓가를 울린다. 우연히 오른쪽 가슴 한쪽 귀퉁이가 움푹 들어간 것을 발견했다. 다음날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둘러 조직검사를 받았다. 초음파를 보면서 세 군데서 여덟 번 조직을 떼어냈다. 지혈을 위해 조직을 떼어낸 자리를 압박하는 남편의 손바닥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이것으로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제 시작인 것을 예감했다.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싸움이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되었다. 잠시 멍한 눈빛이 허공에 흩어졌다. 눈이 붉어지기 전까지 오늘만 울기로 한다. 도대체 내가 뭘 어쨌다는 것인지 자꾸만 억울했다.

 ​ 복사한 조직검사 결과와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해 삼성서울병원 암센터로 갔다. 수술에 필요한 검사들을 하고 나니 온몸은 무너져 내릴 만큼 지쳤다. 그러나 이 순간이 더 없이 행복하다는 것을 예전이었으면 깨닫지 못했으리라. 살아 있음의 소중함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동행한 딸아이는 느닷없는 서울여행이 즐거워 보인다. 광화문을 지나 청계천을 거닐며 나는 잠시나마 서울에 온 목적을 잊었다. 순간순간 기웃거리는 생각들의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지만 그렇게라도 웃을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축복이다. 다섯 살 딸아이를 바라보는 남편의 얼굴은 밝고도 어둡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지에서의 생활은 때때로 당혹스럽다. 무엇보다도 아픈 일이 생겼을 때는 더욱 난감하다. 멀리 사시는 친정엄마에게 아이들을 부탁했다. 정밀검사를 받을 일이 있어 서울로 가는 것이라고 안심 시켰다. 검사 결과에 따라 간단한 수술을 할 수 있다는 말도 했다. 겁이 많은 엄마는 자세히 묻지도 못한다. 녹록하지 않은 세상임을 알기에 나이가 들수록 겁도 늘어 가는 것 같다. 한동안 아버지는 혼자 계셔야 할 것이다. 자꾸만 미안하다. 4월이 깊어가는 날에도 나는 여전히 춥다. 인생을 우여곡절이라고 표현한다. 될 수만 있다면 피해서 가고 싶은 것들을 길목 어귀에서 복병처럼 부딪친다. 산 너머에 또 산이 있다. 산다는 것은 산 너머에 있는 산을 다시 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넘어 온 산이 있기에 다음 산은 조금 더 쉬이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신은 감당치 못할 시련은 주지 않는다고 했다. 나의 기도소리는 새벽이슬과 함께 안개를 걷어낸다.

 ​ "한 숨 푹 자고 나올게"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건네는 나의 한마디에 남편은 살그머니 손을 잡는 듯 했다. '보호자는 더 이상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라는 말이 남편과 나를 가르는 선이 되었다.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이동침대는 미끄러지듯 수술실 안으로 들어섰다. 찬 기운이 먼저 온몸을 휘감으니 나도 모르게 움츠러든다. 얇은 시트 한 장의 무게에 전신의 모공이 일제히 일어섰다. 혼자이다. 눈을 감았다. 마취약이 몸속으로 스며들면서 잠으로 빠져드는 과정에는 순간의 묘한 불쾌감이 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기억해 낼 수가 없다. 회복실에 있었던 기억도 없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실이다. 회복실에서부터 진통제를 많이 맞았다는데 여전히 통증은 심하다. 전이가 되어 림프절을 서른일곱 개나 절제 했다고 한다. 수술 시간은 예상보다 길어졌고 통증은 심했다. 어제 수술을 마친 옆 침대의 환자는 무엇 때문인지 그녀의 남편에게 마구 화를 내고 있다. 그는 아무 대꾸도 없이 받아 내고 있다. 내일쯤이면 나도 저만큼 회복할 수 있으려나 기대해 보았다.

 ​ 처음부터 다인실을 배정 받은 것은 행운이었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서로 아픔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입원기간 내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보호자가 없다 보니 같은 병실의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힘이 미치지 못해도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공감으로 메꾸어 준 사람들이 두고두고 고맙다. 같은 병실에는 십년 만에 재수술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먼저 항암치료를 하여 암의 크기를 줄인 후에 수술을 하는 사람은 나름의 여유를 보인다. 몇 년 전에 자궁암 수술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유방암 수술을 받게 되었다는 사람은 많이 우울해 보였다. 왜 이렇게도 아픈 사람들이 많은지, 일상의 삶을 살아갈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일들이다. 나만 아픈 것이 아니었다.

 인생의 모든 모습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 병원인 것 같다. 같은 공간 안에서 누군가 태어나고 누군가는 죽어간다. 어떤 이는 살기위해 극한의 아픔을 감내하고 어떤 이는 그러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또한 다른 이는 하루만이라도 더 살기를 소원하고 다른 누군가는 단 하루의 삶을 견디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한다. 그곳에는 기쁨과 절망, 희열과 고통과 슬픔이 함께 있다. 그곳의 한가운데 내가 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경계에서 이제 겨우 한발을 내딛으려 한다. 산다는 것은 죽음과 함께 뛰어가는 이인삼각 경기이다.

 ​ 수술을 위해 입원 한 지 9일 만에 퇴원을 했다. 피주머니로 흘러나오는 삼출액이 많아 퇴원이 늦어졌다. 항암치료는 처음 진단을 받았던 집 가까운 병원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옷을 갈아입는 나를 힐끗 쳐다보던 엄마는, 혹시 암이 아닌가하고 걱정을 했는데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하신다. 종괴부위가 바깥쪽이라 전절제를 하지 않고 부분절제를 하고보니 그렇게 생각했나보다. 항암치료를 시작할 날이 다가오니 끝까지 숨길 수 없어 가족들을 불러 모아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엄마는 고개를 돌린 채 듣고 있더니 아무 말씀도 없이 자리를 뜬다. 고등학생인 첫째 아이는 손등으로 두 눈을 쓰윽 문지르며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애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 어찌 하냐면서 나는 애꿎은 남편에게 슬그머니 핀잔을 주었다. 그렇게라도 내 설움을 감추기 위한 것을 들켜버린 것은 아닌지. 지금까지 함께 살면서 두 번째 보는 남편의 눈물이 마냥 나쁘지 않음은 왜 일까. 산다는 것은 순간순간 숨겨진 보물찾기를 경험하는 즐거움이 있기에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 첫 번째 항암치료를 위해 입원을 했다. 첫사랑, 첫 출근, 첫 만남, 첫아들, 첫눈이 내리는 날………. '첫'이라는 글자가 붙는 이야기에는 무언가 모를 아련한 추억과 설렘이 묻어 왔던 것 같은데 오늘은 전혀 아닌 듯싶다. 살아가는 동안 절대로 만나지 않았으면 좋을 '첫'이 낯선 동무처럼 내게 가까이 왔다. 왼쪽 어깨와 가슴사이 피부 밑에 항암주사를 맞기 위해 케모포트를 심어놓았다. 병실로 돌아와 보니 목 뒤에서 등까지 피가 흘러내려 하얀 수술복이 흥건하게 젖어 있다. 벗어 놓은 수술복이 하얀 겨울 숲에 소복하게 내려앉은 동백꽃 무덤 같다.

 항암주사를 맞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사약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아득한 마음이다. 낯선 동무 같은 '첫'에는 긴장감이 묻어서 왔다. 여러 개의 수액 줄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렇게 독하다는 빨간색 주사약이 똑. 똑. 떨어져 수액 줄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 몸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늘어진 수액 줄을 따라 양귀비처럼 화려한 빨간 꽃이 기다랗게 피었다. 자꾸만 피어난다. 내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 수액 떨어지는 소리가 확성기를 틀어 놓은 듯 커다랗게 빈 병실을 가득 메우고 있다.

 다음날부터 항암주사약의 위력은 고스란히 나의 고통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위를 모두 긁어내 듯 토하기 시작했고 메스꺼움과 울렁거림은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밥을 가져왔는데 도저히 먹을 수 없어서 밀쳐 두었다. 딸아이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엄마, 내 있을 때는 말고 내 없을 때 많이 힘들면 내 생각 해." 도로 밥상을 당겨 수저를 드니 밥을 뜨기 전에 눈물이 먼저 떨어진다. 무조건 잘 먹어야 한다며 토하는 한이 있어도 먹어야 한다던 지인의 말이 체한 듯 답답한 가슴을 두드린다. 한 고비 파도를 넘은 것이다. 여덟 번 항암치료 중에 하나를 보내버렸다. 파도타기를 하듯 남은 일곱 번을 넘어 보아야겠다. 나는 서퍼가 되어 보기로 한다. 능숙하지 못해도 괜찮다. 파도에 휩쓸려도 다시 일어서면 될 일이다. 집채만큼 커다란 파도가 밀려와도 등 돌리고 흔들리며 보내야겠다.

 ​ 두 번째 항암치료를 위해 입원하는 날이다. 며칠 전부터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뭉텅뭉텅 한줌 가득 머리카락이 뽑혀 나온다. 가슴이 한 조각씩 베여 나가는 듯 덜컹인다. 입원을 하자마자 원내에 있는 이발소로 가서 머리를 밀었다. 앞 벽면 전체가 거울인 이발소 의자에 앉아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슬그머니 눈을 감아버렸다. 자신과의 눈싸움은 아무래도 낯설다. 거울은 쓸데없이 크기도 하다. 뒤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남편이 농담 삼아 어느 절로 가고 싶으냐고 묻는다. 눈물이 돋을세라 눈을 흘기며 멋쩍게 웃었다.

 머리카락이 없으니 좋은 점도 있다. 머리카락을 말릴 필요가 없어 편리하다. 시원하다. 생각해 보니 어떤 일이든 항상 나쁘기만 하거나 좋기만 한 일은 없는 것 같다. 삶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대가가 늘 따라 다닌다. 가식을 벗은 듯 홀가분한 기분을 느껴본다. 지인들은 내게 가발이 참으로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가발을 눈치 채고 온통 내 머리만 바라보는 것 같다. 아닌 척 외면하며 나름대로 당당히 어깨를 펴고 보니 머쓱하게 웃음이 났다. 일부러 더욱 크게 웃어본다.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 3주 간격으로 항암치료 일정이 반복된다. 둘째 주까지는 힘든 시기이고 마지막 셋째 주는 다소 회복되는 시기이다. 그리하고 나면 다시 다음 차시 항암치료를 시작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메스꺼움과 토악질에 시달리다보면 아무 것도 입에 넣을 수 없다. 온 몸이 내 마음과는 달리 너덜거리는 느낌이다. 먹는 것이 없으니 토할 것도 없는가보다. 차라리 마구 토하는 편이 더 시원할 수 있으련만. 울렁거림과 메스꺼움에 손끝까지 저려오는 고통이 극에 달하여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참는다는 것의 한계점에서 터져버리는 것이 울음인가보다. 나도 모르게 엉엉 울기 시작했다.

 수도 없이 가족들 앞에서 울지 않겠노라 되새김을 했건만 아무런 방어막도 없이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육체의 고통에 서러움까지 더해지니 더 이상 생각이라는 것은 사치가 되었다. 이왕 터진 것을 어쩌랴싶어 마음껏 목을 놓아 통곡하며 울어버렸다. 마치 포효하는 한 마리 짐승 같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울렸다. 둔탁한 종소리가 앞에서, 뒤에서 정신없이 울렸다.

 한바탕 가슴바닥까지 깊숙이 모든 것을 비워내 듯 울어버리고 나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며 마음이 정화 되는 것을 느꼈다. 또한 그렇게 울고 난 것을 고비로 조금씩 음식을 입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목 놓아 우는 것이 이렇게 가슴 시원한 일인지 처음 알았다. 고통의 절정에서 터져버린 울음이 나를 가장 낮은 곳으로 데려다 놓은 것 같다. 내 힘으로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난관 앞에 부딪게 되더라도 생각지 않은 곳에서 길이 열리기도 하는가보다. 가장 낮은 곳에 발을 딛고 나서야 다시 일어 설 힘을 추스른다. 살면서 언젠가 더욱 더 낮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또 다시 만날지 모른다. 힘겨워도 넘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자신감까지 생긴다.

 ​ 그렇게 네 번의 항암치료를 마친 후 서른 세 번의 방사선 치료를 했다. 방사선 치료를 위해 진주에 있는 경상대 병원까지 날마다 한 시간 정도 운전을 하며 다니던 시간은 차라리 휴가기간 이었다. 차 안에서는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러도, 혼잣소리를 중얼거리며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간대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쯤에서 남은 치료를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 마침 선택의 여지는 내게 있으나 남은 항암치료는 생략해도 될 것 같다는 방사선과 의사의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훗날에 혹여 모를 후회가 남을까하여 남은 치료를 마저 받기로 했다. 방사선 치료를 마친 후 다시 네 번의 항암치료를 끝낸 지 벌써 십 사년 째로 접어들었다. 그 사이 일 년 동안 날마다 경구 항암약을 먹는 일도 무사히 마쳤다.

 백혈구 수치가 낮아 치료를 미루기도 했고 감기가 들어 치료를 미룬 적도 있다. 대략 10개월 정도의 투병생활이었다. 몸도 마음도 쳐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운동 삼아 동네 뒷산에 오르거나 여의치 않은 날엔 아파트 단지 둘레를 천천히 걸었다. 어떤 날은 작은 저수지 가장자리에 앉아 가져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 오기도 했다. 때로는 평상시 보지 않던 예능 프로를 보며 일부러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내가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였을 것 같다. 사람들과의 만남은 가급적 피했다. 정서적으로 사람들과 편안한 만남이 선뜻 내키지 않았기에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았던 것 같다.

 '두란노 찬양팀'을 통해 녹음한 편지글과 장미꽃을 함께 선물해 준 남편의 마음이 눈물겹게 고맙던 날도 있었다. 평소 말이 없는 중학생 작은 아들이 찾아와 병실을 지켜 주던 날이었다. 축 쳐진 좁은 어깨로 돌아서 가는 아이를 불러 세웠다. 고맙단 말을 전하는 순간 먹먹한 마음에 터지는 눈물을 애써 감추던 것이 기억난다.

 머리카락이 없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려 늘 두건을 쓰고 지내다가 심한 모낭염이 생겼다. 어린 딸아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두건을 벗어도 흉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다섯 살 딸아이의 대답이 얼마나 나의 가슴을 아리게 했던지. "괜찮아요. 흉하지 않아요. 난 엄마 빡빡머리가 멋있어. 나도 빡빡머리이면 좋겠어요."

 항암치료를 마친 후 한 동안은 느닷없이 찾아오는 고열 덕분에 수시로 응급실 신세를 지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가족들이 더욱 귀하고 감사하게 느껴진다. 살다보니 항암치료로 인한 부작용들도 불쑥불쑥 나타난다. 그것도 이제는 나이 탓으로 돌려버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어깨 아래로 뭉친 근육을 풀기 위해 문지르다보니 감각이 없는 탓에 살갗이 벗겨져 짓무르는 줄도 몰랐다. 손끝의 감각도 무뎌져 때로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손톱은 자세히 보아야 검은 빛이 보이지만 그게 무슨 대수일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더 없는 감사와 축복인 것을. 절대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질병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삶의 면역력이 내게 생긴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 어찌 보면 길고도 짧은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돌아보면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터널을 어찌 지나왔는지 스스로 대견하다. 무엇보다도 가족들이 곁에 있어 주었기에 지나올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창문을 열었다. 상큼한 바람이 초여름 저녁을 휘감듯 시원하게 불어온다. 하늘을 바라보니 일부러 누군가 깔아놓은 것처럼 지난 꿈에 보았던 별들이 유난스레 반짝인다. 산다는 것은 예고 없이 달려드는 크고 작은 파도를 넘어가는 일인 것 같다. 오늘도 오늘만큼의 파도타기를 즐겨봄이 어떨까. 어쩌면 파도타기의 아찔함까지 즐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