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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스토리 공모전

역대 수상작

제3회 핑크스토리 수기 공모전 - 브론즈스토리 수상작 [빈 자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10.06.
조회수
2,534
첨부파일



빈 자리



오륜영







"브래지어가 자꾸만 돌아가네."

 왕뽕브래지어, 노와이어, 브라렛까지 각종 브래지어를 사드렸는데도 엄마의 불편감은 나아지질 않는다.

 "가슴 짝짝이인거 너무 티낸다. 그렇지?"

 농담인양 웃으며 말하지만, 그 웃음 안에 안도와 허탈함이 뒤섞여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2.4센티미터 크기의 악성 종양을 도려낸 엄마의 왼쪽 가슴, 그 빈 자리엔 아무리 비싼 속옷을 사줘도 채워지지 않는 허망함이 있다.

 나는 고작 스물한 살이었다. 여름방학을 목전에 두고 토익 학원에 다닐까, 기차 여행을 떠날까 고민 중인 여대생이었다. 하나 뿐인 딸을 먼 타지에 보내고 쓸쓸할 엄마를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통화를 했는데, 그날의 통화는 아직도 생생하다. 샤워를 하는데 가슴에 무언가 있는 것 같다던 엄마의 말, 그게 무엇인지 단번에 눈치 챈 스스로가 싫었다. 엄마에게 되묻거나 고민 할 것도 없이 병원에 가라고 말했다. 시간 끌지 말고 바로 가보라는 말에 엄마는 알았다며 별거 아니라는 회신까지 주었지만 거짓이었다. 혼자 가기 무섭다며 딸의 방학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엄마를 다그치고 화를 낼 시간도 없었다. 다행히 방학일과 가까운 날짜에 병원 예약을 해두어 더 지체하지 않고 진료를 받았다. 초음파 검사만으로도 유방암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깨끗한 물혹과 암의 비교 영상이라며 보여주신 초음파 영상은 의학 지식이라고는 없는 우리 모녀의 눈에도 확연히 달랐다. 심지어 암을 촬영한 영상은 엄마가 주인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제거 수술을 하고 조직검사를 해보자는 의사의 말에도 희망 따위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유방암 2기, 일찍 발견해서 다행이라고 했다. 허나 총 두 번의 제거 수술로 엄마는 왼쪽 가슴의 절반을 잃었고, 왼쪽 겨드랑이의 임파선을 전부 제거했다. 여생동안 왼팔은 사용할 수 없게 된 엄마는 왼손잡이, 별게 다 속을 썩였다. 왼팔과 손으로는 젓가락질도 하지 말라는 말에, 너무 과장하는 것 아닌가 했다. 임파선 부종이 발병하면 팔이 허벅지보다 굵어진다기에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며 코웃음도 쳤다. 퇴원하던 날, 병원 로비에서 임파선 부종으로 허리보다 굵은 왼쪽 다리에 고통을 호소하는 아주머니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날부터 지금까지 엄마가 장바구니라도 들라치면 '내가 할게!' 가 입버릇이 됐다. 얼마나 무거운지 따위는 상관없다. 엄마의 왼팔이 원형을 유지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엄마의 짐꾼으로 살아도 행복할 것이다.

 수술을 끝내고 나와 마취에서 깨는 내내 오들오들 떨던 엄마의 모습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순간 느낀 감정은 오로지 두려움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유일한 가족을 잃는 두려움이 전신을 삼키는 것 같았다.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요새 암은 감기나 마찬가지에요.' 였다. 그만큼 앓는 환자가 많고 완치된 환자도 많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감기가 폐렴이 되고 위염이 궤양이 되 듯이 암과 죽음의 연결고리는 너무나 단단하게 느껴졌다. 수술은 깨끗하게 잘되었지만 2주동안 입원을 해야 했다. 5인 입원실을 꽉 채운 엄마들은 모두 암 수술을 마친 환자였다. 유방암, 대장암, 간암에 위암까지 참 다양했다. 그 중 엄마와 옆 침대의 아주머니가 유방암이었는데, 이 분 덕분에 '암은 수술 5년 후면 완치'라는 기대가 산산조각 났다. 유방암 수술 13년차에 뼈로 전이되어 수술 불가능, 늑골을 타고 폐까지 전이된 환자였다. 5년만 열심히 관리하고 잘 버티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3일, 그분은 정확히 3일만에 돌아가셨다. 그날 엄마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우리 둘 다 꿋꿋하게 버티기로.

 매일 아침 주치의에게 맨가슴을 보이고 촉진을 받는 부끄러움에서 탈피 할 즈음, 퇴원을 했다. 병원을 나오기 전에 유방암 관리 전담 상담사에게 주의사항들을 들었다. 엄마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고 나는 미리 준비한 수첩에 빼곡이 받아적었다. 고등학교 시절 깜지 쓰 듯이 토씨 하나도 빼먹지 않고 메모했다. 바빴던 손놀림이 무색할 정도로 중요한 것은 딱 하나였다.

 "무엇이든 가리지 말고 잘 드세요."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하셨는데, 알겠다며 격한 고개 끄덕임을 보이면서도 의아했다. 보통은 이거 조심하고, 저건 드시면 안된다고 말할텐데 무조건 잘 먹으라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중에 보니 조심하고 먹지 말아야 할 것들은 항암치료를 끝낸 후, 면역력이 최저로 떨어진 때에 수두룩했다. 상담을 마치고 주사요법실로 향했다. 첫 항암치료를 위해서였다.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운 침대 위엔 저마다 팔뚝에 링거 바늘을 꽂은 채 두건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힘없이 누운 사람들이 있었다. 팩과 유리병 또 까만 봉투를 두른 주사약까지, 코를 찌르는 약 냄새가 불쾌했다. 3주에 한 번씩 이 불쾌감을 견뎌야 했다. 엄마도 한 자리를 차지했고 빛에 의한 변형 가능성으로 까만 봉투에 담긴 항암주사제와 식염수를 함께 주사했다. 그래야 약이 들어갈 때 덜 아프고 빨리 흡수된다는 이유였다. 혈관을 타고 몸에 들어갈 때도 아프다니, 말로만 듣던 항암제는 정말 무서운 존재였다. 잠든 엄마 옆을 지키고 앉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돌아보니, 옆 침대에 홀로 누워 주사를 맞는 아주머니였다. 링거대에 걸린 약병을 보니 엄마와 같은 항암제였다. 몇 번째냐는 물음에 오늘이 처음이라 하니 미간을 찌푸리며 내 등을 토닥여주셨다.

 "엄마 간호 잘해드려. 암보다 무서운게 항암이야. 수술은 아무 것도 아니야."

 첫 항암치료를 마치고 퇴원한지 13일 차, 아주머니 말씀을 눈으로 보았다. 엄마가 샤워 하러 들어간 욕실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급히 뛰어 들어가니 엄마는 떨고 있었고, 머리를 감던 대야엔 새까만 머리카락들이 둥둥 떠있었다. 암보다 무섭다는 항암의 부작용이었다. 대충 거품만 헹구고 나와 동네 미용실로 직행했다. 그날 엄마가 삭발을 하는 내내 미용실엔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워낙에 작은 시골이라 미용실 원장님도 머리를 하러온 손님들도 전부 아는 사람들이었다. 파마를 하는 중이던 친구의 엄마는 내 손을 붙잡고 울었고, 원장님은 직접 못하겠다며 직원 언니에게 이발기를 넘겼다. 다들 울고불고 난리인데 엄마와 나는 거울로 눈을 맞추며 생긋 웃었다. 그날 밤 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지만, 엄마의 동글동글한 두상은 참 예뻤다.

 저승사자도 무서워서 떤다는 항암 부작용은 탈모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탈모는 속눈썹까지도, 체모라는 것은 모조리 털어냈다. 상담사가 강조했던 무조건 잘 먹으라는 말도 백퍼센트 이해했다. 구토가 심했고 그로 인해 식욕을 잃고 면역력이 떨어져 합병증을 앓는다- 는 것이 대개 환자들의 경우라면 엄마는 달랐다. 역시 구토가 심했지만 엄마는 먹었다. 구역질이 올라올 때마다 밥을 먹었다. 토하는 것보다 먹어서 누르고 내려보내는게 낫다며 열심히 먹어댔다. 그러니 식욕감퇴는 남의 말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골고루 잘 먹어야 하는데 엄마 먹을 수 있는 것은 우거지된장국과 초콜릿뿐이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붓거나 살이 찌면 안된다고 했는데 나날이 퉁퉁해졌다. 엄마 평생에 45킬로그램을 넘긴 적이 없는데 세 번째 항암치료 때 50킬로그램에 도달했다. 끼니를 거르지 않은 덕분에 검사상 이상은 없지만 더 살이 찌면 안된다는 말에 운동을 시작했다. 구토를 참기 위해 먹는 것을 포기 할 수는 없으니 몸을 움직이자는 논리였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항암 치료를 마치고 집에 오면 온몸이 아파서 병원에서 알려준 체조를 따라하는 것도 싫다는 엄마였는데, 가벼운 산책이나마 운동을 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1차 항암이 민둥산이었다면 2차 항암은 부는 바람 앞에 위태로운 촛불이었다. 앞선 열두 번의 항암제는 구토를 동반했는데, 뒤이은 열두 번의 항암제 부작용은 전신의 뼈 마디마디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었다. 세수를 할 때도 아파했고 자다가 돌아눕는 것도 아파했다. 그저 매일매일 24시간을 아팠다. 특히 손을 많이 아파했는데 당시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손가락을 다 잘라내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라고 했다. 이때 가장 많이 지쳤다. 꿋꿋하게 버텨내자던 약속은 온데간데없이 우리 둘 다 너무나 지쳤다. 엄마의 간병인이자 보호자인 나는 우울증 치료까지 받았다. 엄마는 몸이 아팠고 나는 마음이 아팠다. 아픈 사람들 둘이 붙어있으니 매일이 전쟁이었다. 대학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엄마를 돌보는 나는 근무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엄마와 함께 집에 있으면 시시때때로 고성이 오갔고, 엄마는 끙끙 앓았고 나는 엉엉 울었다. 암과 싸우는 엄마보다도 먼저 삶을 포기하고 싶은 나날이었다.

 암이라는 것의 생명력이 얼마나 질긴지, 스물네 번의 항암치료를 끝에 서른다섯 번의 방사선치료가 우리 모녀를 반겼다. 방사선의 정조준을 위해 왼쪽 가슴을 중심으로 갈비뼈에 걸쳐 밑그림을 그렸다. 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우리 엄마는 이 당시에 가장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한 번 그린 밑그림은 조금이라도 지워지면 30만 원의 비용을 지불하고 다시 그려야 했다. 샤워를 안하는게 가장 좋다는 말에 엄마는 망연자실했다. 최소 하루 두 번 이상 씻는 사람인데 그걸 하지 말라니, 숙제를 받은 기분이었다. 결론적으로 내가 엄마를 씻겨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는데, 처음으로 엄마와 마주앉아 울었다. 단 한 번도 서로의 눈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는데 엄마는 딸의 손을 빌리는 아픈 자신이 초라해서, 나는 그런 엄마가 안쓰러워서 울었다. 벌거벗고 마주앉아 한참을 울다가 또 하나의 약속을 했다. 이 시간 이후로 혼자든 둘이든 다시는 울지 말자고.

 두 번의 수술과 스물 네 번의 항암치료, 서른다섯 번의 방사선치료까지 우리는 해냈다. 올해로 암 수술 10년차, 항암 종료 9년차가 되었다. 여전히 1년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받지만 우리는 해냈다. 수술 후 정확히 5년이 된 해의 정기검진 결과 날이었다.

 "그동안 피검사상 수치에 한 번도 이상 없었고 뼈검사와 PET검사도 깨끗했어요. 오늘로 5년이 지났으니 이제 한 시름 놓으셔도 됩니다. 고생하셨어요."

 주치의 말씀에 엄마와 나는 경쾌한 하이파이브를 했다. 10년이 되었어도 진료실에 들어갈 때면 긴장을 풀기 위해 심호흡이 필요하지만, 엄마는 건강한 모습으로 내 곁에 있다. 매일 마주앉아 밥을 먹고 수다를 떨고 가끔 다투기도 한다. 정말 미울 때도 있지만 엄마도 나도 잘 알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암과의 사투 속에서 서로가 있기에 버텨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때부터 우리는 고민이 있을 때마다 무릎을 탁- 치며 이렇게 말한다.

 "암도 이겼는데 이까짓거 못하겠어?"

 그러므로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다. 우리는 절대 주저앉지 않고 맞서 싸운 승리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