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
KR
서브비주얼1
핑크스토리 공모전

역대 수상작

제2회 핑크스토리 수기 공모전 - 브론즈스토리 수상작 [나의 언니 김건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9.08.29.
조회수
2,384
첨부파일



나의 언니 김건희



강민주







나는 2남 1녀 중 장녀이다. 어렸을 적부터 엄마에게 언니를 만들어 달라고 졸랐지만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너 같은 딸 하나 있는 걸로 엄마는 충분해, 언니를 어떻게 만들어 주니?"

어렸을 때는 왜 그게 불가능한 일인지 나의 저 말속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졸랐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언니를 만들어 달라는 이야기가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 내 나이 22살에 나는 죽고 못사는 친자매 같은 언니가 생겼다. 나와 언니는 암환자들을 간호하는 암센타 오픈 병동에서 만났다. 모든 것이 새롭고 서툴렀던 신규간호사였던 나와 경력직 간호사였던 언니는 유난히 다른 선생님들보다 꼼꼼하고 환자들에게 친절한 사람이었다. 다른 병원의 암센타에서 오랜 경력을 가진 언니는 다른 선생님들보다 암에 관련된 지식과 기술이 뛰어났다. 수술과 항암요법 방사선 요법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모르는 게 없는 척척박사였고, 환자를 대함에 있어서도 진심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신규였던 내 눈에 그 당시 언니는 닮고 싶은 선배이자 닮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때론 눈물 쏙 빠지게 혼나기도 하고 위로도 받았다. 타지에서 올라와 외로워하는 나를 언니는 다른 신규간호사들보다 유난히 챙겼고 우리는 그렇게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다. 쉬는 날이면 오프를 맞춰 해외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맛있다고 소문난 집을 찾아 다니며 행복한 그 순간을 즐겼다. 우리는 병원에서도 소문난 친구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가 간호사가 아닌 또 다른 길을 찾아 떠날 때 언니는 날 위해 끝까지 응원해주었고 우리는 지속적인 만남을 가지며 친 자매보다 더한 형제애로 똘똘 뭉쳐져 갔다.

​ 내가 암 진단을 받던 그 날
날씨는 엄청나게 좋았고, 벚꽃이 피어나려고 기지개를 활짝 피는 봄날이었다. 예상치 못한 의사선생님의 말에 혈액종양내과 간호사였던 경력이 무색하게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나는 병원 밖으로 나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며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는 나의 울음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 후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외래 진료 중 여러 통의 내 부재중 전화에 전화를 받았고 너무 충격적인 나의 암 진단에 근무를 못할 정도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수술을 받기 전까지 나와 언니는 눈만 마주쳐도 눈물을 흘릴 만큼 서로에게 애틋한 존재였다. 암에 대해 지식이 많은 언니는 그런 지식이 무색할 만큼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주야, 네가 남이 아니잖아. 환자를 늘 안심시키기 위해 괜찮을라고 다독였었는데 막상 내 동생이 진단을 받으니 가슴이 아파. 환자에게 더 잘해야겠어"

어느 누가 나의 암 진단에 그것도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슬피 울어줄 수 있을까 싶다. 암 진단을 받기 한달 전 우리는 후쿠오카에 놀러 갔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시간을 쪼개서 언니와 추억을 만들었던 건 참 잘한 일인 거 같다. 지금도 언니와 사진을 보며 회자하고 있으니 말이다. 암 진단 후 병원 물색에서부터 모든 정보를 동원해 언니와 함께 결정을 하였고, 암 수술 날짜가 잡혔다. 그때까지 언니는 내가 힘든 항암치료를 하지 않길 바랬고, 나 역시 언니와 같은 마음이었다. 항암제를 환자들에게 투약할 주나 알았지 막상 내가 맞게 된다니 머리가 빠지고, 각종 부작용에 시달릴 생각을 하니 암담함과 함께 참담함이 밀려왔다. 암 수술 전 날 여느 때와 같이 언니는 나를 찾아왔고 혈관이 없던 나는 여러 번 혈관주사에 찔렸다. 베테랑 간호사인 언니는 속상해했고,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병실 밖을 나갔다. 수술 후에도 언니는 나를 위해 여러 번 병원을 찾았고 내가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것을 말하면 마법사처럼 모든 다해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진단을 받은 후부터 암과 혼자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 수술 후 결과는 삼중음성이었고, 예후가 안 좋다는 인터넷 정보와 모든 사람들의 말에 또 한번 난 눈물 흘렸지만 언니는 차라리 잘됐다며 약을 장기간 먹지 않아도 된다는 점, 앞으로 나는 임신을 해 가정을 꾸릴 거라는 점 등등 좋은 점을 이야기 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언니의 말을 전적으로 믿으며 앞으로 6개월의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첫 항암은 4월20일이었고, 역시 언니는 나와 동행하였다. 케모포트를 통해 항암 하는 동안 내가 많이 긴장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언니는 나에게 괜찮냐고 여러 번 물었고 항암 부작용으로 쇼크가 오진 않을까 초긴장 상태였다. 하지 않을 수 있으면 평생을 안 왔으면 하는 항암이 닥치자 언니는 안쓰러운 눈빛과 걱정의 눈빛을 보냈다. 그것도 잠시 언니는 나에게 "인생의 굴곡이 조금 일찍 왔다 생각하자, 항암제를 맞는 일이 힘든 일이지만 네 몸 속에 있는 암을 다 부셔버리고 앞으로 평생 100살까지 행복하게 살자, 치료약이 있어서 너무 다행이야." 라고 말했다. 언니 말이라면 찰떡같이 듣는 나는 언니 덕분에 1차 항암을 잘 맞았지만 주사를 맞은 후 부작용으로 힘들었다. 그 와중에 배아동결을 하고 복수까지 찼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는 더 힘든 항암부작용을 겪고 있었다. 퇴근 후 언니는 영상통화로 나의 안부를 묻는 것이 일상이었고, 너무 힘든 항암치료부작용으로 우리 둘은 눈물바다가 되기 일수였다. 그래도 통화의 끝자락에는 치료를 포기하고 싶다는 나의 부정적인 말에 따끔한 호통과 함께 늘 긍정적인 위로를 해주었다.주말에는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항암 중에는 체력이 제일 중요하다며 언니는 우리 집에 와 먹고 싶은 것을 사다 먹이기 시작했다. 난소보호주사로 인해 우울 했던 나는 언니를 보며 다시 힘내야지 마음 먹었다.

​ 어마어마한 빨간 약과 엔독산 4차를 언니는 병원에서 늘 나와 함께 해주었다. 내 항암 일자가 주말이었기 때문에 멀리 제주도에 계시는 부모님과 일을 하는 신랑을 대신해 주말을 반납하고 동생을 위해 헌신했다. 아직 파클리탁셀 12차가 남았지만 이 또한 나의 언니와 함께라면 나는 어떠한 항암제도 두렵지 않다.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고 물러설 곳도 없는 나는 앞으로 언니와 함께 여행을 계획하고 관리하면서 평생 함께 늙어가고 싶다.

​ 한번씩 문득 재발과 전이의 불안과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젊은 암환자인 나는 곁에서 나를 위해 헌신하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있어 항암치료 기간을 이겨내고 있다. 나는 간호사로써 오랜 시간 환자를 위로하고 격려해주었다. 막상 환자가 되니 의료진의 위로가 빈말이 아니었음을 실감한다. 또한 나를 보며 언니는 더 나은 간호사로의 삶이 성숙 해져가고 있다고 한다. 암이라는 건 언제나 불행 한 나쁜 세포라기 보다는 나를 되돌아보고 주변 사람들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지금 살아있음에 감사할 수 있고 언니와 함께 미래를 계획하고 함께 주름이 늘어갈 수 있는 제 2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항상 징징거리며 항암 치료하는 동생을 위해 주말을 반납하는 나의 선배이자 언니인 김건희씨에게 이 글을 바친다. 언니 앞으로도 징징거리는 동생을 어느 누구보다 사랑해주고 위해줘서 고마워, 우리 앞으로 평생 행복하게 잘 지내자, 언니가 있어서 늘 행복하고 나의 불안함을 반으로 덜어줘서 고마워 언니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