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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핑크스토리 수기 공모전 - 실버스토리 수상작 [엄마가 암에 걸려도 괜찮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0.10.06.
조회수
2,458
첨부파일



엄마가 암에 걸려도 괜찮아



김태영







어버이날을 하루 앞두고, 모퉁이를 돌아 터널로 들어가며 엄마에게 그랬다.
 "엄마, 난 엄마가 암에 걸린 게, 참 다행인 것 같아. 참 좋은 일인 것 같아."
 툭 던지는 내 말에 담긴 나름 깊은 뜻을 읽었는지, 씨익 웃는 엄마다.

 ​ 1.
 검사 때 혼자였던 환자는6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 보호자와 2,30대의 젊은 여자와 함께 들어왔다. 딸과 남편인 것 같다. 60세 여자 환자로, 건강검진으로 시행한 유방초음파상 좌측 유방에 불규칙한 경계를 가진 종양이 관찰되어 조직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 Grade 3의 침윤성 유방암(invasive ductal carcinoma) 소견이다. 오늘만 해도 벌써 세번째 암 진단이구나.

 이 결과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밝은 인사를 건네면서도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 지 온 신경을 집중하는 환자와 보호자 모습에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이십 년째 의사생활을 하면서도 늘 피하고 싶은 순간이다. 나는 그저 나온 결과를 전달하는 것뿐인 데, 마치 내게 무슨 판결의 권한이라도 있는 양 '걱정할 건 아니죠?',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해주세요.' 눈빛으로 간절함을 말하는 환자에게, 이제 나는 내가 아는 것을 말해야 한다. 내 눈 앞에 있는 이 데이터들을 전달해야 한다. 최대한 프로페셔널하게, 그리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침을 꼴깍 삼키고 결과를 전한다. 방을 가득 채운 적막 탓에, 내 등을 타고 주르륵 떨어지는 땀 한 방울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오는 것 같다.

 본원에서 수술을 받아도 되고, 원할 경우 상급병원으로 의뢰서를 써드리겠다고 했다. 조금은 생각이 필요하다고 한다. 꽤 오랜 면담 끝에 환자와 보호자가 떠났다.

 의사라는 직업도, 감정노동이다. 이런 진단을 내릴 때면, 얼마전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럴때면 그 당시 내가 겪었던 슬픔과 아픔이, 한 평도 채 되지 않는 이 공간을 가득 메우는 것 같다. 마음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해본다. 하나 둘 셋. 들이 마신 숨보다 조금 더 긴 숨을 내 뱉는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도 같다. 진단은 내 손을 떠났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제 환자와 보호자 몫이다. 너무 많이 힘들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은 동기 녀석 불러내 술이나 한 잔 해야겠다.

 ​ 2.
 아버지는 '아' 하는 짧은 탄식을 끝으로 말을 잃으셨다. 가만 보니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도 같다.

 ​ "암입니다."

 의사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이런 일은 마치 숨 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하다는 듯 우리에게 결과를 말했다. 시간을 멈추게 하는 그 차가운 말을 뱉으면서도 의사는 무척이나 담담해 보인다. "네, 암입니다. 자, 다음 환자.", "네, 암이네요. 자, 다음." 도떼기시장에서 이것저것 바쁘게 파는 상인도 이것보다는 상냥하겠다 싶다. 갑작스러운 아내의 암 판정에 나는 너무나 무기력해진다. 원망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이를 책임질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괜히 의사의 상냥하지 않음을 탓했던 거다.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떨군다. 왜냐하면 이건 모두 나 때문이니까.

 나는 잠시 동안 아주 깊은 생각에 빠져버렸다. 과거와 미래의 시간으로 깊이 침잠했다. 몸은 여전히 진료실에 있으면서 말이다. 의사의 담담한 말 한 마디에, 아내의 가슴에 2.3센티미터 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그 말 하나에, 즐겁고 행복한 일이 더 많았던 내63년 인생은, 그래, 너무나도 애달파졌다. 모든 것이 후회되고 원망스러워졌다.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 내 얘기 좀 들어 보소. 35년을 함께해온 내 마누라가 갑자기 유방암에 걸렸답니다. 나 만나 고생만 한 사랑하는 우리 마누라, 착한 마누라 몸에 암 덩어리가 자라고 있답니다. 이건 순전히 다 나 때문이지. 그렇지. 내 아내가 암에 걸린 건 전부 다 나 때문이오.

 아버지는 본인을 탓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에는 이내 뜨거운 회한의 눈물이 흐른다. 그간의 세월을 눈물로 쏟아낸다. 그 동안의 시간이 너무나 슬퍼진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앞서 내달려 본 미래 역시, 슬픈 건 매 한 가지다.

 ​ 3.
 엄마는 60년 세월을 제대로 돌아본 적이 없다.

 ​ 그냥 하루하루 살았을 뿐인데 내 나이가 벌써60이라니. 꿈만 같다. 인생은 참으로 무상하다. 고집쟁이 남자와 살며 미래를 꿈꿀 겨를도 없이 그저 하루 먹고 살기에 바빴다. 시골 들판을 뛰어다니던 어린 소녀였던 나는, 넉살도 늘고 주름도 늘어 어느 새인가 생활력 좋은 대한민국의 억척스러운 아줌마, 아니, 할줌마가 되어 있었다. 자식들의 재롱과 웃음에 함께 웃고, 이웃의 안타까운 사연에 눈물 흘린다.

 회사 건강검진으로 7년째 유방촬영(X-ray)만 하다 무슨 바람이었는지, 이번에는 유방초음파를 받아 보기로 했다. 한 번도 안 받아본 거니까. 차가운 젤을 잔뜩 머금은 프로브가 유방 위를 움직인다. 난 아무리 봐도 뭐가 뭔 지 모르겠는데, 이것저것 기록하는 전문가들을 보고 아 역시 다르구나 감탄도 해 본다. 일렁이는 흑백 음영이 마치 푸른 바다 위 부서지는 파도 같다며 혼자 상상의 나래도 펼친다. 그런데 의사가 잠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갸우뚱 한다. 한 곳을 가리키며, '이거 보이죠?' 한다. 뭔가 덩어리 같은 게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조직검사를 받아야 한단다. 악성 종양일 수도 있다고 했다.

 잔잔하던 내 마음이 물결이 되어 요동친다.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다. 딸과 남편, 든든한 지원군을 옆에 끼고 진료실로 들어선다. 진단이 무엇인가요?
 별 거 아니겠지 하며 하하 호호하며 들어온 진료실이지만, 의사의 말을 기다리고있자니 괜히 침이 마르는 것도같다. 의사가 내게 암을 말한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조금 당황스럽다. 내 어머니를 암으로 먼저 보내고도 나는 늘 안전하겠지, 괜찮겠지 하며 이 세월을 살아왔다. 꿈 같다. 꿈 인가?

 그런데 암 진단을 받았는데도, 잠깐의 당황스러움이 사라지자 나는 생각보다 덤덤하다. 눈물보다는, '아 그래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이성적 질문이 먼저 나온다. 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아, 내가 암 보험이 몇 개가 있더라', '당장 회사는 어떡하지', 현실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다음 날은 아주 일찍 잠에서 깼다. 어떻게 잠에 들었는 지도 모르겠다. 몸을 일으켜 침대에 그냥 걸터앉았다. 딱히 무슨 생각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어느새 나는, 길고 길었던 내 60년 세월을 찬찬히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사는 게 바빠 상념에 빠지는 건 사치라 생각했다. 그래서 내 인생을 마주하는 건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둘째로 태어난 나. 오빠, 동생과 산이야 들이야 뛰어다니던 내가, 먹고 살기가 힘들어져 도시 생활을 시작했다. 크게 기억나지 않는 10대, 20대를 보냈다. 젊음으로 남편을 만나고, 아들 딸을 낳고.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참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힘들고 고되었지만 그래도 난 참 행복했다. 행복한 추억을 돌아보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러다 문득, 어제가 떠오른다. 내게 암을 말하는 의사의 차가운 모습이 떠오른다. 마음이 점점 차가워지더니, 방금까지 행복하다 느껴졌던 내 인생에 슬픔과 아쉬움이 더해진다. 단출하지만, 그래도 함께할 수 있는 가족이 있어 행복하게만 느껴진 저녁 밥상이, '암'이라는 단어 하나가 더 해지자 그렇게 초라하고 서글플 수가 없다.
 슬픔에 젖어들다보니 행복이 사라지기 시작하더라. 난 행복한 저녁 밥상을 그대로 남겨두고 싶었다. 즐거운 일이 더 많았던 내 과거를, 암이라는 슬픔으로 누르고 싶지 않았다. 아름다웠던 내 시간에 굳이 지금의 문제를 더할 필요는 없었다. 암 덩어리를 굳이 과거로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 지금의 눈으로 과거를 볼 필요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는 과거의 눈으로 봐야겠구나, 미래는 미래의 눈으로 보면 되겠구나 싶었다.
 갑자기 눈 앞이 밝아져 온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이다. 그렇네. 여전히 아침은 밝아오는구나. 내가 암 진단을 받아도 여전히 태양은 떠오르고, 우리 시골집에는 새들이 날아오는구나. 나는 그 때의 눈으로, 그 때의 마음으로 그 때를 살면 되겠구나.

 ​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구나.

 ​ 4.
 수능 공부를 하면서도 드라마는 꼭 챙겨봤다. 욕을, 욕을 하면서도 연속극은 꼭 챙겨봤다. 그래서 한국 드라마에 절대 빠지지 않고 나오는 스토리. 착한 주인공이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는 막장 전개, 지독히도 악하기만 했던 못된 시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고 개과천선하는 그런 막장 전개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긴장감 넘치는 배경음악이 없어도 의사의 눈빛만 봐도 다음 스토리를 예상할 수 있었다. 이런 게 바로 조기교육의 효과인가.

 그래서 진료실에 들어서는 순간 알았다. 아빠를 한 번, 나를 한 번 차례로 바라보는 의사 눈빛에 바로 알았다.
 그런데 아주 뜻밖에도 나는 참 괜찮았다. '암입니다.'하는 의사에게 나는 '그렇군요.' 했다. 서른이 넘어서도 엄마만 바라보는 엄마 껌 딱지인 내가, 엄마의 암 판정에 의외로 괜찮았다. 한숨을 길게 내쉬는 엄마, 눈물 흘리는 아빠 틈에서, 마음 약하기로 소문난 딸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사에게 질문을 던진다. 온 몸으로 부정하며 눈물, 콧물 쏟아내는 것도, 거리를 헤매며 깡소주를 냅다 들이켜는 것도, 그저 드라마 속에나 나올 한 장면일 뿐이었다. 신기하리 만치 난 괜찮았다.

 진료실을 나와, 소식을 기다릴 오빠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의 암 진단을 들은 오빠는 깊은 한숨만 전할 뿐, 잠시 동안 말이 없다. 이 집 남자들은 참으로 조용하구나 생각한다. 의지할 가족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집으로 가는 차 안은 종전과 다를 바 없다. 이따금 뒤에서 아빠의 '아이고' 소리와 한숨이 들려올 뿐, 9월의 햇살은 여전히 따뜻하고 조금 시원해진 바람은 가을을 부른다.

 ​ 달라진 건 없다.

 ​ 5.
 엄마의 암 진단 일주일 뒤, 오빠는 결혼을 했다. 시골 아주머니로 살던 엄마 얼굴에 고운 색들이 더해졌다. 엄마는 참으로 고왔다. 안 그래도 풍성한 머리가 오늘은 더 부풀어, 마치 사자 같다. 소식을 듣고 이따금씩 안타까움을 말하는 친척들에게는 '음, 그렇군요'로 대답했다.

 결혼식장에는 새로운 출발을 앞둔 예쁜 신랑신부와 당신들의 역할을 멋지게 해낸 부모님의 후련함만 있었을 뿐, 암은 그곳에 있으면서도, 그곳에 없었다.

 모든 것이 참으로 순조로웠다. 의사 친구들이 추천해 준 소위 명의를 만나, 수술 날짜를 잡는다. 푸른 한복의 고왔던 엄마는, 푸른 환자복 차림에도 여전히 곱다. 가슴 한쪽을 잘라낸다는 데도, 암 수술을 한다는 데도 우리는 여전히 까르르 웃는다.
 아빠는 엄마가 들어간 수술실 앞을 떠나지 않는다. 이따금씩 깊은 한숨을 내쉬고, 누가 암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어느새 그 쪽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셨다. 나는 그냥 그곳에 있다.
 수술은 잘 됐다. 1.8센티미터의 종양을 떼어냈고, 전이는 없으며, 최종 병기는 1기로 진단받았다. 항암치료 네 번, 방사선 치료 18번, 허셉틴 표적치료 스무 번으로 치료방향이 결정됐다.

 ​ 6.
 네 번의 항암치료를 받으며 수북했던 엄마 머리가 그렇지 않게 됐다. 부드러웠던 손이 거칠어지고 얼굴엔 주름이 더 깊어진다. 장군 같던 몸이 초등학생 마냥, 작고 가냘퍼졌다. 다리가 마비되고 손발톱이 갈라진다. 그런데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본 내 마음에 속상함은 없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의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내게는 속상함이 없었다. 아파하는 엄마의 손발이 될 수 있어 나는 좋았다.

 나의 괜찮음에는 이유가 있었다.

 내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 도대체 왜 내게, 왜 엄마에게 이런 일이 생기냐며 신을 원망하고 하늘을 원망하는 거다. 사흘 밤낮을 울어제끼고, 수척한 모습으로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는 거였다.
 그리고 또 하나. 받아들이는 것. 그렇군요 하는 것. 더 이상 그렇지 않은 것으로 만들기 위한 에너지를 쓰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시간의 흐름과 함께 가기로 했다. 자기가 멈춰 있는 거 면서, 세월이 흐르고 모든 게 변한다며 슬퍼하는 대신 나는, 그 변화와 함께 가기로 했다.
 엄마의 암 진단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렇구나'였다. 엄마가 수술을 받는 것도, 엄마 몸에 종양이 자라는 것도, 그냥 그런 것이었다. 하늘에 태양이 떠오르고, 꽃이 피어나고, 내리던 비가 그치고, 달이 차오르는 것처럼, 그냥 그런 것이었다. 그런 것을 그렇지 않은 것으로 하다 보니 사람들이 지치고 힘든 거지.
 암이라는 말에 눈물과 속상함, 슬픔이 물감처럼 번져가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지금 이 곳에 없기 때문이다. 그 찰나의 순간에 마음이 과거와 미래로 떠나 버리기 때문이다. 엄마가 바로 옆에 앉아 있음에도, 미래의 어디 한 곳에 멈춘 마음은, 더 이상 곁에 없는, 떠나버린 엄마를 그리워한다. 엄마가 없는 세상에서 이제 어떻게 사느냐고, 멈춰진 그 곳에서, 엄마가 없는 미래에서 슬퍼한다. 그러면서 그 때의 슬픔을 현재로 고스란히 가져온다. 불안을 데려온다.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엄마는 여전히 옆에 있는데도 엄마를 그리워하며 미래를 미리 울어버린다.

 과거의 고생하던 엄마를 떠올리며 그 안쓰러움 역시 현재로 가져온다. 좀 더 잘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원망, 죄책감을 불러온다. 왜 그때 이렇게 하지 않았나, 지금의 마음, 지금의 눈으로 과거를 본다. 내 몸은 지금 이곳에 있는데,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나는, 과거를 후회하며 속상함을 느낀다. 여전히 엄마는 옆에 있는데.  지금 이 순간을 기어코 과거와 미래로 가져가 그때의 감정으로 뒤범벅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암이라는 의사의 말에 '그렇군요' 대답할 수 있었던 건, 수술실에 들어가는 엄마에게 하하호호할 수 있었던 건, 사자 머리 같던 엄마 머리카락이 낙엽 떨어지듯 우수수 떨어질 때도 괜찮을 수 있었던 건, 그래서 엄마에게 조금은 도움되는 보호자가 될 수 있었던 건 말이다. 빠르게 달리는 기차에서 직접 뛰어내려 놓고, 기차가 떠났다며 슬퍼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곳에 서서 바라보는 대신, 그 기차를 타고 함께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미래나 과거로 가는 대신, 그 순간 속에서 변화와 함께 가겠다 다짐했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는 없다. 지금만 있을 뿐이다. 지금을 살다보면 속상함이 없다.

 ​ 7.
 영화 속 유명한 대사, '내일을 사는 사람은 오늘을 사는 사람에게 죽는다.'는 말은, 오늘이 가진 힘이 얼마나 큰 지 여실히 보여준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일들은 일어난다. 감기에 걸렸다는 것에 비해볼 때, 암은 분명히나 큰 일이다. 삶과 죽음이 달린 문제일 수도 있기에 그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암 판정을 받게 되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의 싸움을 지켜봐야한다. 환자가 됐든, 보호자가 됐든 나의 역할은, 이미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은 일로 만드는 대신, 지금을 살며 변화와 함께 가는 것이다. 내가 변화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질병을 이기는 데 긍정적인 생각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한다. 맞는 말이지만, 조금 더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긍정적이라는 것은 무조건 하하호호, YES를 외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1기라니, 전이라니 다행이네요, 좋네요 하는 것이 아니다. 긍정적이라는 것은 어떤 일에 좋다, 나쁘다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이다. 그냥 그렇구나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구나의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에너지도 들이지 않는 것이다. 일어난 일들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간다. 그 에너지에 사람들이 지치고 힘이 드는 거다.

 엄마가 암 진단을 받던 그날, 나는 영국 대학원에 등록 포기 이메일을 보냈다. 금융 전문가로 살던 런던 생활을 접고 시골에 쭉 눌러앉으면서도 나는 참 좋았다. 런던 펍에서 즐기던 맥주 잔 대신, 작은 호미를 손에 들고 텃밭에서 일하면서도, 아빠 면도기로 엄마 머리를 직접 밀면서도, 나는 괜찮았다. 나는 좋았다. 이미 일어난 일에 좋다, 나쁘다 이름을 붙이는 대신, 과거의 엄마, 미래의 엄마를 만나는 대신, 지금 이곳에서 내 옆에 있는 엄마와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애써 과거로 돌아가 고생하던 엄마를 만나지 않기로 했다. 애써 미래로 먼저 가 떠나간 엄마를 그리워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난 지금 현재에 있기로 했다. 내 눈 앞에 있는 엄마와 함께 하기로 했다. 피주머니를 달고도, 난 몸이 참 건강한가? 피도 많이 안 나오네. 내가 이 병동에서 제일 건강한 가봐. 매일매일 신나게 만보 걸음을 채우던 엄마와 함께 했고, 새로 자라나는 곱슬머리에 감동하는 엄마와 함께 한다. 시골 대청마루에 누워 하루에 이 시골집에 얼마나 많은 새가 날아오는 지, 하늘이 얼마나 푸른지 함께 본다. 땀 흘리며 함께 운동하고, 함께 지금을 산다.

 모든 속상함과 불안은, 내가 규정속도를 지키지 않아서다. 삶은 여전히 잘 흘러가고 있기에 나는 지금 이 곳에서 변화와 함께 가면 된다. 잠시 또 생각에 빠져 과거와 미래의 어느 한 순간으로 갔다면, 다시 돌아오면 된다. 행복하고 설레는 감정만 조금 들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 된다.

 ​ 수 억 개의 세포 중에 '암 세포'라는 이름이 붙은 세포들이 덩어리를 만들었을 뿐, 엄마 그 차제가 암이 아니듯, 슬프고 속상한 감정이 생겨난다고 해서 내 인생이 갑자기 속상하고 슬픈 것이 되진 않는다. 인생이 참 우습고 재미지다는 것만 기억하고 살면, 이 순간에서 변화와 함께 가면 된다는 것만 기억하고 살면, 엄마가 암에 걸려도 파란 하늘과 시원한 가을 햇살을 즐길 수 있다.

 ​ '암'이라는 단어 하나의 그 엄청난 슬픔에 눌려 고통받는 분들이 있다면, 지금 이 곳에서 변화와 함께 가라는 말을, 다시는 오지 않을, 그리고 결국엔 그것 밖에 없을 지금 이 순간을 살아보시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 이렇게 긴 글을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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