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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스토리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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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핑크스토리 수기 공모전 - 핑크스토리 수상작 [Amor Fati]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9.28.
조회수
2,285
첨부파일



Amor Fati








'나에게도 서른이 온다면'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암을 억제하는 유전자가 없어 여덟 번 째 찾아온 암과 투병중인 스물셋 소녀 제니 양의 이야기였습니다. 저도 유방암으로 투병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공감하며 책을 읽었습니다. 뼈암, 유방암, 뇌암 등 생후 6개월부터 암과 동행하며 수차례의 수술과 치료를 받아야 했던 제니. 그녀는 종양 억제 유전자라 불리는 TP53 유전자에 결함이 생겨 몸 어디에서든 암이 자라는 '리-프라우메니 증후군'이었습니다. 만일 자신이 계속 살더라도 전신에 암이 잘 생겨 평생 암과 싸워야 할 거라는 제니의 고백을 읽으며 '이런 유전자 변이도 있다니... 참 안됐다'라고 생각하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 저는 유방암 재발 판정을 받았습니다. 만 20살에 첫 진단을 받은 후 벌써 4번째 재발이었습니다. 5년이면 완치인 줄 알았던 암은 8년 만에 재발해 매년 저를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수술한 조직의 경계에서 계속 암이 나와 재수술을 한 것만 두 번. 지금까지 6번의 유방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2014년도부터 햇수로 5년간 매년 수술과 치료를 반복한 것 입니다. 젊고 건강할수록 암의 진행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자주, 이렇게 많이 암과 싸워야 할 줄은 몰랐습니다. 가족 중에 호르몬성 암을 가진 사람도 없었고, 술 담배를 하지도, 식습관이 나쁘지도 않았고 수시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에 남들이 다 겪는 입시 스트레스도 없었습니다. 계속된 투병으로 몸과 마음은 지쳐갔고 '왜 나지? 왜 나일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병원에서 권해준 유전자 검사인 BRCA검사에서는 BRCA2가 조금 애매하다는 소견이었지만 미보유로 판정되었습니다. 반복된 수술과 항암, 방사선 치료 후에도 1년을 못 넘기고 재발이 이어지자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새롭게 개발 중에 있다는 유전자 검사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유전자 검사에 대해 설명을 듣고, 동의서를 작성하고 7통 가량의 채혈을 하였습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그 사이 저는 수술을 마치고 항암치료에 들어갔습니다. 2차 치료를 앞두고 유전자 클리닉에서 결과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결과는 'TP53 유전자 돌연변이'. 사실 진료실에서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도 제니 양과 동일한 유전자 돌연변이인 것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무거운 호흡으로 조분조분 의사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몸속에 암세포가 생기면 세포의 이상증식을 억제하여 암세포를 사멸하도록 유도하는 항암 유전자. 즉 TP53 유전자가 활성화 되는데 이 유전자에 이상이 생기면 더욱 악성도가 강한 세포가 출현하게 된다고 합니다. 23개의 인간 염색체 쌍 중 17번째 존재하는 유전자로 TP53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유전자의 염기서열이 바뀌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덧붙여 TP53 유전자 돌연변이와 함께 가족력이 있는 환자는 '리-프라우메니 증후군(LFS)'으로 묶이는데, 이는 전 세계 암환자 중 5%에 해당하는 극소수라고 했습니다. 전신에 암이 잘 생기는 체질이라 소아기에 백혈병이나 뇌종양으로 투병하는 환우들 중 대부분이 이 유전자 돌연변이라고 합니다. 제가 겪었던 유방암, TP53 이상으로 발생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시며 앞으로 대장암, 뇌종양을 비롯한 각종 암의 발병 가능성이 높으니 전신 mri와 위, 대장 내시경, 산부인과 검진 등을 추가하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병력이 있어서 유전자 검사를 받는 환자들 대부분이 유전자 돌연변이 아닌가요?" 하고 묻는 저의 물음에 "아니요. 실제 환자 중 유전자 돌연변이는 20%밖에 되지 않아요." 라고 답하셨습니다. 왜인지 모르게 붙잡고 있던 가느다란 희망마저 사라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늘 '이번이 마지막 치료야. 이번이 마지막 수술일거야!' 하고 버텨냈던 저이기에 유전자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결과는 앞으로 식습관을 조절하고, 꾸준히 운동을 하며 스트레스 없는 환경에서 지내도 필연적으로 암이 재발 될 거라는 공포를 안겨주었습니다. 내 일이 될 줄도 모르고 제니양의 책을 읽으며 그저 안쓰럽다고 생각했던 제 자신이 우스웠습니다. 더 안타까웠던 것은 유전자 이상이라는 검사 결과를 받고도 아직 이렇다 할 치료법이 없어 실제 치료에 활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금도 힘들게 항암 치료 중인데 당장 무슨 일이 날 것처럼 유전성 대장암 클리닉을 예약하고 가라며 종용하는 의사 선생님이 야속하기만 했습니다. 듣도 보도 못했던 TP53 유전자 이상이라는 결과를 받은 이 날이 암 진단, 재발 진단을 받았던 때보다도 더 절망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도 원망스럽고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습니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약인 것 같기도 합니다. 7번의 암 수술과 10차례가 넘는 항암치료를 하면서도 늘 밝고 활기찼었는데, 유전자 검사 결과를 들었던 이 날은 마음을 다잡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집에 와서 밥도 먹지 않고 계속 TP53 유전자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고 수집하였습니다. 저의 경우 가족력이 없기 때문에 '리-프라우메니 증후군'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망가진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혹시나 비슷한 사례가 있을까 하여 유방암 환우들이 모이는 카페에 글을 올려 보기도 하고, 해당 유전자와 관련된 도서를 구입해서 공부했습니다. 아직 연구 중이라 자료가 많지는 않았지만 수소문 끝에 브로콜리와 양배추가 좋다는 내용과 견과류의 일종인 '캐슈넛'이 TP53 유전자 복구에 특히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매일 섭취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병원에서 하는 표준 치료에 모범적으로 임하며 제가 할 수 있는 노력들을 해왔습니다. 식단 조절, 운동, 영양제나 건강 보조식품 챙겨먹기, 신앙생활을 통한 마음의 여유. 무엇보다 작년에 폐 수술을 한 뒤로는 서울 생활을 접고 강원도로 이사도 했습니다. 좋은 공기와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매일 산에 오르며 몸과 마음을 회복하려 부단히 노력 중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쏟은 뒤에는 겸허히 하늘의 결과를 기다리라'는 말처럼 유전자 결과가 어떻든 간에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해볼 생각입니다. 우선 느슨해진 식습관부터 개선해보려 합니다. 간식도 브라질너트, 제철 과일, 고구마, 곶감 등으로 바꿨습니다. 또 서울에서 요가나 필라테스 같은 실내운동을 했었다면 여기서는 매일 설악산 트레킹을 하거나 한적한 호숫가를 걸으며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있습니다. 꿈을 다시 갖는 것도 이번 치료의 목표입니다. 대학교 회계팀에서 근무하며 안정적인 삶을 꾸렸지만, 인생이 유한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저로써는 한번뿐인 삶. 꼭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직장을 그만두고 교육대학원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계속된 재발과 지방 이전으로 다시 목표를 설정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몸이 다시 아파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상황이 속상할 때도 있지만 제가 언제까지나 병과 싸우고만 있을 거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P53 유전자 돌연변이가 있더라도 병은 제 몸에서 만들어진 것이니 제 노력으로 좋아지게 할 수도 있다고 확신합니다.

 무엇보다 저와 같이 아프고 힘든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이른 나이에 걸린 '암'이라는 병을 통해 또래가 겪지 않는 많은 일들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타인의 작은 아픔도 제 일인 것처럼 크게 공감하고 그때그때 제가 할 있는 일들을 찾아서 해왔습니다. 대학교 때에는 소아암 환아를 위한 학습지원 봉사나 보육원 노력봉사를 했고, 호스피스 시설로의 정기 후원도 10년 째 이어 오고 있습니다. 자신이 아픈 줄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머리를 빡빡 깎고 손, 발에 주사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모습을 보며 결혼, 출산, 육아 등 못해본 게 많다며 억울해 했던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는 여유가 생겨 시각장애인 학생을 위한 학습 봉사와 '사랑의 선교회'라는 수도회에서 거동이 불편한 분들을 보살피는 활동을 했습니다. 암도 무서운 병이지만 눈이 안 보인다는 것,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에 활동을 하면서 제가 더 많이 배우고 느낀 것 같습니다.

 내 상처가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두 가지 암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므로 그동안 배운 것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며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인 'Amor fati' 라는 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라는 뜻으로 힘들 때마다 항상 되새기는 말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제 인생이 굴곡 많고 힘든 삶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암이라는 산도 몇 번씩 넘어 보았기에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겨도 담대하고 씩씩하게 해내곤 합니다. 치료 할 때마다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실천하는데 절벽 다이빙, 스카이다이빙 같은 아찔한 체험을 했을 때에도, 다른 종류의 힘든 일이 생겨도 '나는 암도 이긴 사람이야!' 라고 생각을 하니 별거 아닌 일이 되어버려 오히려 즐기게 됩니다. 이런 마인드라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못 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일이면 저는 3차 항암치료에 들어갑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투병중인 환우분들, 소아암 환자들, 희귀병으로 치료약이 없어 힘들어 하는 분들, 경제적인 사정으로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분들, 그리고 이 모든 환자들을 돌보느라 애쓰는 가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어려운 병이지만 버티고 또 버텨서 희귀한 유전자 변이에 의한 암도 정복되는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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