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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스토리 공모전

역대 수상작

제1회 핑크스토리 수기 공모전 - 실버스토리 수상작 [평생 사랑 평생 웬수 내 남편 정길씨]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08.31.
조회수
2,078
첨부파일



평생 사랑 평생 웬수 내 남편 정길씨








여보, 우리 팔팔하고 건강하고 예쁠 때 연애편지 서로 써보고 몇 년 만에 써보는 편지인지 좀 어색하지만 당신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자 이렇게 써봅니다.

 처음 유방암 선고를 받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2009년도 7월 17일, 유방암 2기초 선고를 받고 수술한지 어언 9년이 지났는데도 그때를 생각하면 서글픈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입원해서 조직검사를 받고 병원에서 암 선고를 내리기 전에 보호자를 찾는데, 당신은 집에 가고 없었지. 의사선생님들이 도대체 보호자 어디 갔어요? 라고 하는데 아무 것도 모르던 난 집에 가서 자고 내일 오기로 했는데요. 왜 그러세요? 라고 선생님들께 물었어. 그런데 어쩐지 말도 안하고 이상하게 싸한 분위기가 흐르는 거야. 그렇게 그날 밤이 지나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의사선생님들이 왔어. 보호자 아직 안 왔어요? 또 묻더라고. 조금 있으면 올 텐데요, 라고 하니까 다시 아무 말 없이 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환자에게 직접 당신은 유방암입니다, 라고 하면 충격 받을까 봐 먼저 보호자에게 말하려고 자꾸 찾았던 거겠지. 그런데 당신은 집에서 술 먹고 자느라 오전 시간이 다 지나도록 병원에 오지 않고, 보호자가 늦게 오니 그냥 나한테 말해주더라.

 "검사 결과 악성 종양이 나왔습니다." 난 담담하게 그럼 나 암 걸렸나요? 했어. 순간 실감도 안 나고 실없는 웃음만 나왔지. 그런데 마침 당신이 들어오더라. 내 남편 얼굴을 보니까 설움이 북 받쳐서 여보, 나 유방암이래요. 하는데 당신은 내 시선을 피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알고 보니 당신은 이미 전날 저녁에 담당의사가 전화해서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어떻게 술 마시고 잘 수가 있어? 당장 달려와 마누라 얼굴 봐야 하는 거 아냐? 난 당신의 생각은 헤아릴 수도 없이 원망이 밀려와서 정말 정말 밉더라고. 평생 옆에서 남이 자기 마누라보고 해코지를 해도 모른척하고 편 한번 말 한번 속 시원히 안 해주더니 이런 중한 일을 당해도 역시 저 사람은 저럴 수가, 저 사람이 내 남편이었구나... 원망하고 욕하고 악다구니를 쓰면 뭐하냐구. 지금 난 암환자인걸. 어쨌든 그렇게 수술하고 항암화학요법을 시작했잖아.

 여보! 그때 당신 나 항암 받을 때... 그 시간에 아, 저 사람이 정말 나의 반려자라고 생각한 거 알아? 당신하고 45년 사는 동안에 정말 남편으로 생각하고 느끼게 해 준... 죽는 게 더 나을 것처럼 힘들고 고통스런 항암 여덟 번을 받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건 누웠다 간신히 일어나 침대 머리에 앉아 저절로 흐르는 눈물에 기운 없이 흐느껴 우는 게 전부였어. 그럴 적마다 당신은 내게 다가와 울지 마, 울면 골 울려서 더 아파, 라고 하면서 등을 돌려서 업듯이 뒤로 감싸 안고 하나 둘, 하나 둘, 계속 발맞추어 거실을 왔다 갔다 걷게 하고 내가 힘없이 등에 엎드려 울고 끙끙거리면 어... 어... 괜찮아. 으 응, 괜찮아 진다. 하면서 계속 애기 없고 달래듯이 삼사십 분을 내가 진정될 때까지 달래줬어. 그렇게 당신 등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당신 체온을 느끼며 힘든 것도 어느 정도 누그러지더라. 한번은 용기 내서 물어봤어. 나 암 선고 받던 날 왜 그랬는지. 빨리 달려와서 달래줬어야 하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당신이 하는 말. "안 그래도 마음 약한 마누라 속상할 텐데, 나까지 우는 꼴 보이기 싫어서 그랬어."

 그랬구나. 당신도 혼자 울었구나. 그래도 병원에 왔어야지. 슬프면 같이 얼싸안고 우는 게 부부잖아. 바보 같은 내 남편, 내 웬수. 지금 생각하면 그때 당신도 많이 힘들었을 거야. 당신이 그랬었지. 항암 받을 때는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무슨 일 생길까 봐 신경 곤두세우고 봐줬다고... 하긴 항암 받는 거 자식들도 반대했었어. 엄마가 하도 몸이 약하니 못 이기고 죽을까봐. 나도 거의 받지 않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는데 담당선생님이 우선 한 번 받아보고 정 힘들면 그때 가서 하지 말자고. 그렇게 시작한 항암, 고생도 많았지만 그래도 남편의 진짜 사랑인지 뭔지 이상한 가슴 찡한 걸 느꼈다니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후로도 꼭 병원에 데리고 다니고, 기다리기 지루할 텐데도 항상 군소리 없이 기다려 주고. 그렇게 9년이 지났잖아요. 그런데 요즘 족저근막염이 생겨 발바닥 마사지를 남편이 해줘야 하는데, 이 남편이 안 해주네. 아침에 깨면 종아리에 쥐가 잘 나서 너무 고통스러워 비명을 지르면 그때마다 얼른 와서 문질러 주고 가긴 하는데, 그래서 내가 몇 번 발바닥 좀 만져줘 하면 마지못해 한 대여섯 번 문질러주나, 오만상 찡그리고 힘들다 이거지. 항암처럼 죽을 처지가 아니라 이거지. 아이고, 더럽고 치사해서...

 그래, 긴병에 효자 없단 옛날 얘기 나도 잘 알아. 당신도 지겹고 지칠 때도 되었지. 가끔 '세상에 이런 일이'에 마누라 간병 지극히 하는 남편 사연 나오면 아이고, 부럽다 하다가도 저런 남편이 드무니 세상에 이런 일에 나오겠거니 하고 내 웬수같은 남편 얼굴 한 번 쳐다보면 괜히 웃음만 나오고. 참 꼴 보기 싫고 밉다가도 그때 항암 치료할 때 업고 달래주던 그 시간을 재빨리 떠올리며 얼마나 고마운 내 남편인지 자꾸자꾸 되새긴다니까... 이 얼마나 행복한 나의 인생 이야기인가.

 돌이켜보면 당신은 한결같이 무뚝뚝했어. 사랑한다 예쁘다는 말 먼저 해준 적도 없고. 그러고 보면 어쩌면 내가 암환자이기에 느껴본 남편의 따스함(?) 그게 아님 평생 못 느껴볼 뻔 했으니 나 유방암 걸리길 잘했네... 여보, 마지막으로 당신 마누라가 내 남편 생각해서 한 마디만 할게. 술 좀 사흘에 한번만 먹고 당신 마누라한테 부드러운 목소리와 정다운 눈길로 쳐다봐줘. (옛날 연애할 때처럼은 바라지도 않아.) 나도 그럼 더 잘할게.

 병 걸린 게 벼슬, 유세는 아니지만 그래도 변치 말고 계속 지켜봐줘요. 나 당신 많이 사랑해요. 당신이 말 안 해도 나 당신 마음 다 알아. 당신도 나밖에 없지? 많이 사랑하고 있지? 나 죽을까봐 겁나지? 그리고 세상에서 내 마누라가 제일 예쁘다 생각하고 살지? 우리 서로 아끼고 누가 보더라도 추하지 않게 곱게 늙어 같은 날 같은 시에 손 꼭 잡고 같이 하늘나라로 가자구요.

 추신. 여보, 고마워요.
♥♥♥2018년 6월 8일 잠 안 오는 밤, 마누라가